[전시 전경] Distan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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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tancing> 

2012. 9. 6 - 16 

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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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의 공간들_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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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의 공간들

  

정현 (미술비평)

 

 

  서재정은 원근법을 변용해 공간을 재구성한 건축적 회화를 보여준다.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은 언뜻 보면 건물을 닮은 구조물처럼 보이는데, 구조물을 구성하는 벽 혹은 막 안에 좁은 골목 안 풍경이나 건축적 양감이 부각된 구조물이 그려져 있다.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은 깊이로 대표되는 회화/건축의 시점을 반대로 평면으로 변환되어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듯하다. 서재정은 우연찮게 건축사 수업을 들었고 건축 양식을 토대로 도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건축적 시점은 회화의 원근법처럼 외부의 시선이 건물의 표면을 도려내어 실내를 보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른바 해부학적 시선에 의해 분석된 공간은 보는 방법의 표준이 되었다. 한국에서 서양식 원근법이 유입된 건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라고 한다. 근대적 시점은 해부학적으로 공간을 분석하는가 하면 고층 건물이나 고가 도로 위에서 도시를 바라 볼 수 있는 시점의 위상 변화도 일어났다. 건축과 도시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이와 관련된 이슈나 이미지를 수집하기도 하고 실제 서울 답사를 진행하면서 핵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이 서구 원근법의 변주를 통해 공간 속 공간을 제시한 반면, “Illusory”“Phantasmagoria”에서는 실제 건축물에서 장식의 부재에 의해 건축적 구조만이 존재하는 익명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다. 장식성과 디테일이 사라지면서 건축물은 생명체로써의 정체성이 상실되면서 입체적 요소만이 남는 셈이다. 중립적 건축물은 오로지 형태만으로 우리에게 노출되어 있다. 그곳이 실존하는지, 가상인지, 장소가 어디인지는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진다. 게다가 이 같은 건축물의 모호한 상태는 해체주의 건축의 특성과 유사하다.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스위스 건축가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는 건축을 쓸모 없는 것이라 평했다. 실제 삶의 조건에 부합하는 건 건축이 아니라 건물(building)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츄미는 건축의 구조와 장식이 하나로 작동하는 새로운 건축을 추구했는데, 장식에 의해 파생되는 권위나 건축적 위계질서를 해체하여 하나의 건축이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체가 되는 파리의 라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를 완성한다. 츄미의 전위적 논리가 서재정의 건축적 회화와 닮은 것은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합리적 상징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권위를 대표하는 아치형 기둥으로 이뤄진 건축적 구조물로 아치 안에 원근법으로 그려진 또 다른 아치가 삽입된 초현실주의적 공간이 등장한다. 데 키리코를 연상시키는 이 상상의 건축물은 조형적 복합성 이외에도 상징으로써의 건축 공간이 또 다른 공간으로 연장되는 이중적 시간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Structure 시리즈는 건축적 요소인 계단이나 기둥처럼 공간을 형성하기보다 구조를 떠받치거나 이동을 위한 기능의 요소를 분리해 기하학적 드로잉으로 전개된다. 서재정은 건축물을 그리고 있으나 이를 입체적 구조물로 환원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특히 실제 생활하는 내부보다 건축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중에서도 Structure 작업에서는 평면성과 입체성을 대비시켜 불안정적인 공간을 의도적으로 강조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장 보드리야르와 건축가 장 누벨과 나눈 대화 안에서 어렴풋이나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장 누벨이 설계한 카르티에 재단 건물(Fondation Cartier)은 전체가 유리로 지어진 이 건물 앞에는 그보다 더 높은 담에 의해 실제 건물의 존재는 마치 신기루처럼 보인다. 카르티에 재단 건물은 시각적으로는 실재와 가상이 혼재한 상태로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착시를 일으키도록 유도하였다. 우리는 건축을 물리적 구조물로 생각하지만 장 누벨의 생각은 다르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건축적 조작) 가상 공간이나 정신적 공간을 창조하는 방법입니다.”[1] 환영, 착시는 고대건축부터 사용되던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건축적 착시는 눈의 연약함을 이용한다. 실제보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게 보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장 누벨이 주장하는 건, 건축에 대한 고정된 사고를 버리자고 말한다. 우리는 도시와 도시를 채운 건축물을 고정된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 누벨은 도시와 건축을 불안정적 대상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도시, 건축을 습관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지각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불안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감성을 지각하게 하여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이 되게 하는 이러한 방향 전환은 건축이 제 것으로 삼아야 할 개념입니다.”[2] 서재정이 원근법을 변용하여 평면과 입체가 공존하는 이질적인 건축적 세계를 제안하는 이유는 아마도 건축을 빗대어 심리적인 공간을 드러내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1] 장 보드리야르/장 누벨, 『특이한 대상-건축과 철학』, 동문선, 2003, 23

[2] 같은 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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